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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학,인문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어떤 내용인가?(1부)

by 아톰97 2023. 8. 16.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철학책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로 흘러 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칸트를 모르면 서양철학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몇 백년 동안 그 수 많은 철학자들이 칸트의 철학에 매료되고 기를 쓰면서 칸트를 읽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공자도 아닌 우리가 몇년씩 걸리는 그 어려운 책을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겠죠.

 

그럼 이제 칸트 철학의 핵심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몇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우주는 유한한가? 우주는 무한한가?

시간에 시작은 있는가? 없는가?

인간에게 영혼은 있는가? 영혼 따윈 없는가?

자연에서의 모든 사건은 인과법칙을 따르는가?아니면 자유롭게 일어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런 질문은 헛소리,넌센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뭐라고 대답 했을까요? 칸트도 비슷하게 대답했습니다.하지만 칸트는 좀 더 점잖은 

사람 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인간의 이성은 이런 문제에 대답할 수 없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트겐슈타인과 칸트는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인간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이것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의 의미 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의 비판 이란 말은 인간이 가지는

이성의 능력에 한계를 긋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시간에 시작이 있는지 없는지,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영혼이 있는지 없는지,그런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하려는 것 자체가 월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궁금 합니다.이런 의문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비밀을 자꾸 들추어 보려고 하죠.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500년 동안 철학자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쟁에서 그 누구도 단 한번이라도 이긴 적은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단 한번이라도 해결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 났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는 이유도 비로 이러한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는 겁니다.

 

하지만 칸트는 단언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이죠.

인간이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칸트는 그것을 수학,기하학,물리학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이라고 하는 사람 좋게 생긴 철학자가

나타나서  수학, 기하학, 물리학은 진짜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 철학자의 말에 칸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흄의 주장에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 입니다.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흄이 무엇이라고 했길래 칸트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난 걸까요?

이제부터 흄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흄은 모든 명제를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로 구분 합니다.

선험적 명제는 "3+2=5"와 같은 명제를 말합니다.이 명제는 참이죠.

그런데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손가락으로 세어보지 않아도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점간의 최대거리는 직선이다"라는 명제도 참입니다.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두 점간의 거리를 측정을 

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이런 종류의 명제 즉,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명제를 선험적 명제라고 합니다.

 

선험적,즉 경험 이전에 이미 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명제라는 말입니다."창 밖에 비가 온다"라는 명제는 어떤가요?

이 명제는 참인가요?거짓인가요? 이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려면 우리는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아야 합니다.경험을 해야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이러한 명제를 후험적 명제라고 합니다.

 

후험적,즉 경험을 해야 알 수 있는 명제라는 말입니다.선험적 명제는 항상 참입니다.선험적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라는 겁니다.하지만 후험적 명제는 참일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고 있을 수도 있고,비가 오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창 밖에 비가 온다는 후험적 명제는 우연히 참인 명제 입니다.

이처럼 모든 명제는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명제를 선험적 명제냐 후험적 명제냐 구분하지 않고

분석적 명제냐 종합적 명제냐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분석적 명제란 주어 속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명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총각은 남자이다"와 같은 명제를 말하죠.

총각은 정의상"결혼하지 않은 남자"입니다.따라서 총각이라는 주어 속에는 남자라는 의미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런 명제를 분석적 명제라고 합니다.분석적 명제는 아무런 지식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어를 풀어서 술어로 기술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철수는 총각이다"라는 명제는 어떨까요? 이 명제는 분석적 명제가 아닙니다.

철수를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철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수는 총각이다 라는 명제는 철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지식을 담고있는 명제 입니다.

이런 명제를 종합적 명제 라고 합니다.

 

그런데 흄은 이렇게 말합니다.수학적 명제와 기하학적 명제는 선험적이면서 분석적 명제라는 겁니다.

수학적 명제와 기하학적 명제는 선험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분석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예컨대

"3+2=5"라는 수학적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아무런 지식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3에다가 1을 더하면 정의상 4가 되고,4에다가 1을 더하면 정의상5가 되므로 3+2를 분석해보면 정의상 5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점간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라는 기하학적 명제도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아무런 지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두점간의 최단거리를 '직선'이라고 우리가 정의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수학적 명제나 기하학적 명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정의상 참인 명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흄은 물리학적 명제는 후험적이면서 종합적 명제라고 말합니다.

물리학적 명제는 종합적이기 때문에 지식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후험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연히 참인 지식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컨대 물체를 허공에 놓으명 중력가속도로 땅에 떨어진다" 는 물리학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우연히 참인 명제 라는 겁니다.그런데 잠깐 물체가 떨어진다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가 아닌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흄은 뼈 속까지 경험론자 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물체를 허공에 놓았을 때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수백만번 수천만번 보았다고 해도 우리는 물체가 필연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필연"이라는 것은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물리학적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그래서 흄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수학적 명제와 기하학적 명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명제이고,물리학적 명제는 우연히 참인 명제일 뿐이다.

따라서 수학,기하학,물리학은 진짜 학문이 아니다.

칸트는 흄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수학 기하학 물리학이 진짜 학문이 아니라니....

하지만 칸트는 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칸트가 보기에 수학 기하학 물리학은 진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었기 때문 입니다.

흄은 수학과 기하학은 선험적이면서 분석적이고,물리학은 후험적이면서 종합적이라고 말했지만 

 

칸트는 수학 기하학 물리학은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즉 필연적으로 참이면서 지식을 확장하는 학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수학 기하학 물리학이 어떻게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일 수 있을까요?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무시무시한 책을 쓰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인식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해결책을 제시 합니다.

 

보통의 카메라로 인물사진을 찍으면 우리가 보는 인물 그대로 사진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열화상 카메라로 인물의 모습을 찍으면 우리가 보는 인물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무지개색들이 여러개로 뒤엉킨 모습으로 나타납니다.또는 X레이 사진이나

자외선카메라로 찍으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디.

그럼 어느 카메라가 가장 좋은 카메라일까요? 이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장소마다 목적마다 서로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느 카메라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 할까요? 이 질문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그 어떤 카메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카메라가 더 잘 재현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카메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열은 없습니다.

인식을 하는 방법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보거나 듣는 방식으로 인식을 합니다.

바쥐는 사물을 초음파로 인식하고,뱀은 열화상카메라처럼 사물을 인식 합니다.

색맹인 개와 고양이는 흑백으로 인식하고

오징어와 문어는 음파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합니다.그렇다면 어떤 동물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까요?

이 질문에도 정답은 없습니다.그 어떤 동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동물이 더 잘 인식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모든 동물은 사물을 각자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입니다.여기에도 우열은 없습니다.

 

자,여기 내눈 앞에 사물이 하나 있습니다.내눈에 이 사물은 둥글고 빨갛고 매끄럽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여기 이렇게 

있는 건가요? 아니죠~ 이건 사실 내 두뇌가 시각 정보를 받아서 이렇게 해석한 이미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고있는 모든 사물들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가 해석한 이미지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물이 진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만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이 사물을 둥글고 빨갛고 매끄러운 것이라고 인식한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의 구조가 이 사물을 둥글고 빨갛고 매끄러운 이미지를 구성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감각자료를 내가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내 머리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인식하는 방식이 감각자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여 대상을

인식한다는 겁니다.인식의 방향이 바뀐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없으면 이 사물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이러한 모습,즉 둥글고 매끄럽고 빨갛게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는 사물이라는 말을 안 쓰고 대상이라는 말을 씁니다.'대상' 내 앞에 마주서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공전한다는 천동설을 주장 했습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이것을 뒤집어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을 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죠.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뒤집어 버린 겁니다.이처럼 칸트는 인식의 방향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대상으로부터 감각 자료가 들어와서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대상을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칸트의 주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