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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학,인문학

서양철학(형이상학)

by 아톰97 2023. 8. 13.

서양철학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2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 이기도 합니다.

형이상학 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의 어원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하게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그와 달리 제자들은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방대한 스승의 글을 정리하지 않았던 겁니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3세기경 안드로니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 관한 글을 많이 써두었는데 안드로니쿠스가 글을 정리해서

physics 라는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런데,어떤 글들은 자연에 관해서 이야기한것 같기도 하고,아닌 것 같기도 한데,

제목도 없는 정체불명의 글들이었던 겁니다.

안드로니쿠스는 고민고민 하다가 대충 묶어서physics뒤에다 붙이면서 metaphysic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여기서 meta라는 단어는 "그 다음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physics다음에 있는 글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meta라는 단어는 '~을 넘어서' '~을 초월해서'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metaphysics가 어떤 초월적인 궁극의 질문을 다루는 학문 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겁니다.

이후에 일본의 학자들이 metaphysics를 번역할때 주역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해서

"형이상학" 이라고 번역했다고 봅니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일까요?

개략적으로 말하면 "존재와 존재자에  대해서 궁극의 질문들을 다루는 학문" 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어떤지 알아보겠습니다.

 

플라톤(이데아세계)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데아세계와 현실세계로 나누었습니다.

이데아세계: 이성의 눈으로만 보이는 가지계,진짜 세계

현실세계 : 감각의 눈으로 보는 가시계, 가짜 세계 

 

예를 들면

편안한 쇼파와 나무의자가 있습니다.생긴건 다르지만 둘다 의자 입니다.

그런데,쇼파에 앉으면 아주 편안하겠지만,나무의자에 앉으면 조금 불편합니다.

그래서 쇼파를 좋은 의자,나무의자를 나쁜 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자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의자가 있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완벽한 의자가 있어야 의자에 좋고 나쁨의 기준이 있을 수 있고,

그래야 좋은의자 나쁜의자가 있을 수 있잖아요.그렇다면 그 완벽한 의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현실세계에 있는게 아닙니다.그것은 

이데아세계에 있다는 겁니다.그래서 이데아의 의자가 진짜 의자이고,

현실세계의 의자가 가짜의자라는 겁니다.이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플라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문제가 2가지 생깁니다.

 

첫째, 도대체 현실세계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플라톤은 

현실세계가 이데아세계를 모방한 세계라고 합니다.왜 그러한 모방의 세계가 존재해야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둘째, 도대체 현실세계에서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데아세계는 완전하므로 운동과 변화를 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이데아세계를

모방한 현실세계에서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2가지 숙제가 생겼습니다.

첫째는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이데아세계를 붕괴 시켜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이 현실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둘다 다르게 생겼지만 둘 다 의자라고 합니다.왜냐면 사람들이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자의 기능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기능을 가지면 전부 의자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앉을 수 없는것은 의자가 아닙니다.따라서 어떤것의 기능이 바로 그것의 본질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기능,이러한 본질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형상만 가지고는 이런 의자들을 만들 수 없습니다.질료(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질료들이 앉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게 될때 그것이 바로 의자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의자란 질료가 형상을 가지게 된것을 말하는 겁니다.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은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 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저기 위에 올려 놓고서 현실세계에 가짜라는 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이원론적 세계관을 구축 했습니다.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 형상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서는 그 형상을 현실세계로 다시 끌고 내려왔습니다.그렇게 함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현실세계로 통일시켜 버린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두번째 숙제는 현실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고대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만물은 변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한다'고 대답했고,

파르메데스는'변화는 불가능하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파르메데스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변화하는것 같지만 이성의 눈으로 꿰뚫어보면 세상은 변화하는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변화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은 대체로 파르메데스의 입장을 받아들인 겁니다.

 

플라톤은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진짜 세계인 이데아세계는 변화하지 않고,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세계는 가짜라고 말합니다.기본적으로 파르메데스와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두개의 세계를 하나의 현실세계로 통일시켰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현실세계가 진짜이고 따라서 만물이 변화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였을 겁니다.그래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필요가 생긴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

예를 들어 도토리 한알이 있습니다.도토리알이 땅에 떨어지면 도토리싹이 틀겁니다.

즉 도토리알은 싹이 될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땅에 떨어지므로써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된겁니다.

그래서 도토리알을 가능태라고 하고,도토리싹은 가능성이 현실이 된 상태라고 해서 현실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토리싹은 점점 커져서 도토리묘목이 됩니다.즉 도토리싹은 묘목이 될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점점 자라면서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된 겁니다.그래서 도토리싹을 가능태,도토리묘목을 현실태라고 합니다.

이제 도토리묘목은 점점 더 자라서 참나무가 됩니다.그러면 도토리묘목은 가능태 참나무는 현실태가 됩니다.

그래서,도토리알,싹,묘목,참나무는 가능태이면서 현실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모든 개별자들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태이면서 이미 무엇이 된 현실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개별자는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도토리알,싹,묘목,참나무 모두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겁니다.이처럼 모든 개별자는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가능태이고,그 가능태가 현실화가 되면서 새로운 개별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자가 운동과 변화를 하는 이유라는 겁니다. 

목적론적 관계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한 개별자들에게 목적론을 불어 넣습니다.각 개별자는 각 개별자의 

목적이라는 겁니다.이처럼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그것이 존재하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에게 위계를 세웁니다.

아래에 있는것들은 모두 위에 있는 것들을 목적으로 한다는 겁니다.그렇다면 이 위계시스템에서 

제일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거기에는 어떤 형태로 갖추어 있지 않은 질료만이 있겠죠?

이것을 순수질료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계의 제일 위에는 질료도 없고 형상만 있는 추상적인 순수형상이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 순수형상은 결국 이데아와 같은 겁니다.결국 플라톤과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같은 목적지에 도착을 한겁니다.

따라서 세계의 운동과 변화는 개별자들이  순수형상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그리고 순수형상은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것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그것을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1500년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개념을 받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것의 원인의,원인의,원인의,원인을 찾아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이 있을거라고 

말합니다.그리고, 그러한 최초의 원인은 다른 어떤것의 결과는 아니면서 다른 모든것의 원인이라는거죠

그것이 바로 부동의 원동자라는 겁니다.

곧 이것은 창조주라는 겁니다.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목적론적 체계와 중세 기독교사상이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서양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